겪어보고 알게 된 미국문화(4)
최고의 문화적응 교육은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다.
13살 재미교포 여자아이가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각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 페북에 올린 글을 읽고 친한 분이 걱정스럽게 전해 준 말이다. 사회복지부에서 은퇴하신 분이라 자주 이런 문의를 받고 계시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이런 슬픈 소식이 감춰져서 그렇지 이민가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문제다. 부모가 학교에 찾아오면 못 본 척 숨는 아이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유교적 가치를 버릴 수 없는 부모와 정반대의 학교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갈등. 아이들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부모의 마음이 무척 안쓰럽게 느껴진다.
이중문화 가정의 혼혈아들 사이에서는 이런 갈등이 비교적 적다. 미국인 아빠나 엄마 한쪽으로 문화가 기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화적 갈등이 적은 편이다. 혼혈 아이들은 한국인 엄마나 아빠의 문화를 관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재미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미국적이지만 완전히 미국인이 될 수 없는 한국 엄마가 가끔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미국인 남편처럼 혼혈인 아이들도 그런 엄마가 특별히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거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혼혈아들이 사회에 나가면 배려심이 유별나게 커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 하는 경우도 흔하다. 국제결혼 가정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이 더 활발하게 리드할 수 있도록 존재감을 높여줘야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국제결혼 가정과는 달리 양쪽 부모가 이민자인 경우에는 입장이 다르다. 개척민이란 현실 때문에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하며 일생을 살 수밖에 없다.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하나 없다 보니 경계심을 내려놓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긴장을 요구하게 된다. 더 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 아이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강요하기 쉽다.
부모라는 확실한 사회안전망을 갖고 살아가는 2세들 입장에서 보면 왜 부모가 미래를 걱정하라고 강요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재촉하는 부모의 반복적인 강요에 노이로제 증상까지 느끼게 되고 반항까지 하게 되는 것 같다.
비록 정서적으로는 미국화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미국화되지 못한 나 역시도 경계를 내려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들이 가끔은 “Relax dad. Everything will be ok. (아빠 진정하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라며 꼭 안아줄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큰 위로를 받는다. 세상은 그렇게 험한 일만 벌어지는 곳이 아니고 꼭 성공해야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실패를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용기도 생긴다.
가까운 곳에 첫 집을 산 딸과 사위는 아빠가 머물 수 있는 방을 꾸며야겠다고 말한다. 미래를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는 아빠의 마음을 안심 시켜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아들이나 딸보다 더 부자고 일도 더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이들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은 아직도 불안에 떠는 이민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쁘고 기특한 내 새끼들.
이런 재외 동포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재외동포재단이다. 매년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그 많은 돈이면 1년에 몇십 개씩 한인 커뮤니티 센터를 지어 줄 수 있는 돈이다. 동포들이 모여 사는 지역마다 이민자들이 부담 없이 모여 음악공연도 보고, 그림 전시도 관람하고, 각종 이벤트를 즐기면서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만 있어도 좋겠다는 바람이다.
문화 적응 교육은 꼭 강의실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교육은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고, 그 멍석 위에서 이민자들이 지지고 볶고 하면서 배워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마땅한 일이고 책임이다.
전 현직 회장님들께는 실례되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이제는 회장님 없는 한인 단체를 구상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냥 유급직원 한 사람만 고용해 운영하는 한인 집합체 방식을 고민해 보시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