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9일은 LA 사태가 벌어진 날입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남성이 4명의 백인 경찰들의 추격 끝에 붙잡혀 곤봉과 주먹으로 무차별하게 폭행을 당했는데 법원이 4명의 백인 경찰을 모두 무죄로 판결하였고, 그런 법원의 불공정한 판결에 분노한 시민들이 폭력 시위를 벌인 사건입니다.
저는 어느 한국 방송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터라 14일간 쪽잠을 자며 LA 사태 현장에서 취재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4명의 백인 경찰관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시위였는데, 시위가 시작되고 24시간도 되지 않아 미국의 거의 모든 방송은 이 사태를 한인 이민자와 흑인 주민들의 갈등 문제로 집중하여 보도하더라는 겁니다. 심지어 3~4일 뒤에는 아이스 큐라는 유명 흑인 가수가 한인 상인들을 원망하는 노래까지 만들어 기자회견을 여는 거예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들고 물어보았습니다. “로드니 킹과 한인 상인들이 무슨 상관이기에 이런 노래를 만드신 겁니까?” 덩치 큰 주최 측 경호원들에게 마이크를 빼앗기고 기자회견장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되었어요.
미국인들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많이 악용하는 “Wack the dog (옆에 있는 개 패대기치기)” 라는 전략이 벌어진 결과로 안타깝게도 소수중에서도 소수인 한인 이민자들이 이 사태의 “옆에 있는 개”가 되어 패대기를 당한 참혹한 사건이었습니다.
LA 사태가 끝나고 한흑갈등이 무엇인지, 어떤 배경에서 발생하게 된 문제인지 그 진실을 찾아보고 싶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한인 소유의 편의점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가게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관찰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에피소드 하나를 목격하게 된 겁니다.
어느 젊은 흑인 여성과 함께 들어온 아이가 회전식 땅콩 진열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만 넘어트리고 말았답니다. 한인 주인아저씨가 놀라면서 다가와 진열대를 바로 세우고 널브러진 땅콩 봉투를 주워 담으면서 웃는 얼굴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이코… You make big problem. Why touch? Don’t touch. Ok?” 그리고는 아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 친 겁니다.
옆에 있던 흑인 엄마가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당신, 왜 내 아들을 때리는 거에요? 추잡하고 저주스러운 한국 노인네가 @#%$….” 흑인 엄마는 아저씨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일장 욕설을 쏟아내고는 사려고 들고 있던 무언가까지 내팽개치고 가게를 나가는 겁니다.
이 상황을 한국식으로 해석하면요. “아이코, 이 말썽꾸러기야 왜 그랬어. 조심해야지.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알았지?” 친절하고 너그러운 동네 아저씨의 사랑스러운 훈계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명하게 전달한 메시지가 흑인 엄마에게는 매우 불쾌하게 전달된 것이지요.
‘이것이 한흑갈등의 밑바탕에 깔린 안타까운 사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LA 사태가 얼마나 폭력적인 결과로 나타났고 한인 이민자들에게 얼마나 억울한 사건이었는지를 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이 아니라 양측의 오해를 오해라고 말해주는 일이 우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큐멘터리 제작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4,000만 명이 넘는 미국의 모든 흑인 시민들에게 한국인들이 이렇게 말할 때는 너그러운 아저씨의 사랑스러운 훈계이고, 저렇게 말할 때는 저주가 담긴 모욕적 언어라는 사실을 모두 다 가르쳐 줄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수십만 명 정도 되는 한인 상인들에게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욕으로 전달되고, 저렇게 말씀하시면 칭찬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더라고요. 또한, 우리보다 더 먼저 와서 사는 다수가 변해 주길 바라는 것보다는 뒤늦게 온 소수가 그들의 문화에 맞춰 변화해 가는 것이 옳은 일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 이민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이들을 위한 한글학교도 아니고, 각 지역 한인회가 주최하는 연중행사도 아니고, 이곳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문화 적응 훈련, 문화 소양 교육 뭐 그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의 종점에 도달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재외 동포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주요 방송사 기자라는 신분 덕에 한국 정치인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 마다 이런 저의 생각을 전달하고 체계적인 문화 적응 교육프로그램 개발과 실행을 요구해 왔습니다. 꼭 저의 그런 노력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행히 김영삼 정부 때 재외동포재단이 설립되었어요. 첫해 예산은 겨우 30억이라서 서울의 사무실과 직원 몇 명 월급 주는 정도의 의미 없는 규모였지만 그나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4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를 만나게 되었어요.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저의 소견을 드릴 수 있었고, 선거 때마다 “용공”으로 몰리던 김대중이 “용공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미국 정가의 유력 정치인들이 확인해 줌으로써 보수진영이 늘 써먹던 “용공 작전 저지”를 책임 맡게 되었습니다. 드리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저도 대통령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혹시라도 대통령이 되시면 저희 재외 동포들이 현지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문화 적응 교육을 시행하도록 해 주시고, 그런 교육을 위한 구심점으로 교민청을 각 주요 도시에 설치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우리가 모두 한인 입양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선택해서 미국에 오거나 미국 시민이 된 것이 아닌 만큼, 언제든 이들이 한국 국적회복을 희망할 경우 한국 국적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 혼혈 아이들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한국혈통입니다. 이들이 언제라도 한국 국적을 희망할 경우 언어와 문화 차이로 군에 입대하긴 어렵지만, 공익근무를 통해 병역의무를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주십시오. 약속해 주신다면 혼신을 다해 총재님을 돕겠습니다.”
“당신은 재외 동포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와 정치해야 할 사람 같네. 좋은 정책이니 당신이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꼭 그리되도록 노력할 것이야.”
대통령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고, 1998년 6월 재외동포법을 통과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한인 단체가 이 사안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에 단체의 대표성을 이용해 주도권을 빼앗아 가면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지 못해 정책 없는 법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인 단체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아요. 30대 초반으로 나이가 너무 젊어 저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지 못한 저의 부족함이 더 컸기 때문이고 정치참여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 성향 탓이기도 하니까요.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안타깝게도 한흑갈등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인 이민자들을 향한 갈등요소는 몇 배 더 커진 상황이에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입니다.
이제는 부모의 나이가 된 2세 한인 혼혈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운지.
혼혈인 조카들에게 가끔 한국적 가치, 한국적 사상, 왜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에 관해 설명해 줄 기회가 가끔 있는데요. 그때마다 전해주는 말의 실제 내용보다 열 곱, 스무 곱으로 크게 받아 드리는 조카 아이들의 어깨가 펴짐을 느끼기도 합니다. 피로 이어받은 한민족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큰지를 매번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안한 생각만 들어요. “왜, 한민족 중에서도 최고의 한민족인 혼혈인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일까?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최고의 외교관이고 홍보원들인데 왜 그렇게 소중한 자산을 자산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제는 한국 정부나 지도자뿐 아니라 한인 이민사회의 한인 1세들에 까지도 이해와 관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부족함이 많으셔서 자신들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분들인 것 같고, 자기들보다 잘난 혼혈 한국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실 만큼 아량이나 식견이 넓지 않으신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그런 아쉬운 마음이 가슴속 깊이 남아있었는데, 사임당 소사이어티 (‘사소’한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장세희 회장 (띠동갑 누님)과 에스터 모리스 사무총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재외 동포 운동가로 잘 알려진 정정자 회장님 같은 훌륭한 분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희망을 준 사소한 모임. 개인적으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먼발치에서라도 품격과 인품을 지닌 분으로 전해 듣고 페북에서라도 가까운 친구로 지내던 강승구 회장님까지 참여하고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작지만, 희망도 느껴졌습니다.
그런 사소한 모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그런 마음이 모이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감투나 생색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의 흠을 덮어주고 만나면 즐거워 또 만나고 싶은 재미난 모임이 될 수 있다면, 모이는 마음 자체만으로도 우리 한인 혼혈인, 입양아, 2세, 3세들에게 한국 정서와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큰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선한 영향력에 미력하나마 오랜세월 고민해 오던 문화적응 교육과 한인 정체성 구축에 저의 미력한 지식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그런 댓가없는 생각과 행동이 실천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생각과 실천을 지적이나 질타가 아닌 응원과 박수로 대답될 수만 있다면 사소는 한인 이민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모임이 될 것같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군가 큰 손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다. 수십, 수백 명이 모여야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단 몇 명이라도 사임당이 해 오셨던 것처럼 아름다운 글과 그림, 개인 교사처럼 자식을 천재적으로 키워내신 은은한 영향력으로 빚이 되어 주실 수 있다면 분명 그런 빚 속에서 소외된 우리 한인 혼혈인들에게 값지고 목말라 하는 한국의 고유하고 이상적인 정신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허황한 믿음이 아니라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이고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바람이 간절하여 용기를 내 길게 글을 썼습니다. 너무 길게 써서 죄송합니다.
[Photo credit: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PlNxmHvOl5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