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혐오 범죄가 일상화되면서 이제는 뉴스에서조차 보도되지 않고 있다. 뉴스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혐오 범죄가 사라진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혐오 범죄에 대해 한인 단체들이 너무 조용합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칼럼 하나 부탁드립니다.” 어느 일간지 편집장의 주문이다.
무어라 써야 할까? 150자 정도의 분량의 칼럼으로는 도저히 다 쓸 수 없어서 정중히 거절했다. 의도와는 달리 자칫 한인 단체들의 기능을 비판하는 글로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다. 주위의 한인들은 아시안 혐오 범죄가 코로나 사태로 인한 일시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그런 일반적인 인식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 생각하는 필자의 견해가 자칫 공포 조장으로 비쳐질 것 같은 부담도 있었다.
미 상원과 하원은 무려 2,500억 달러라는 엄청난 예산으로 짜인 ‘중국견제법안’을 초당적으로 지지하면서 지금 통과 과정을 밟고 있다. 역전당하고 있는 기술력 차이를 극복하자는 법안이다. 정치적으로는 러시아를 군사적 적대국이라 말하지만, 내심 중국이 미국의 최대 적대국임을 입증하는 법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의 정서도 그렇다.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89%가 중국을 ‘경쟁자’ 혹은 ‘적’이라 답했다. 스웨덴에서도 85%가 중국에 대해 비호감을 표했고, 호주는 81%가 중국을 싫어하고 있다. 같은 동양권인 일본인의 86%, 한국인의 75%가 중국에 대해 비호감 적이라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중갈등은 쉽게 나아 질 문제가 아니라 계속 나빠 질게 분명해 보인다.
미국인들에게 비치는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정서는 어떨까? 중국인이 아니니까 좋은 사람들로 볼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일반 시민들 눈에는 국가적 차이가 아닌 인종적 차이로 판단될 테니까.
거의 모든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미국경제가 역대 최고액의 달러를 찍어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좋아진다면 아시안 혐오 범죄는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투잡을 뛰어도 기본생활비조차 채우지 못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조금이라도 완화될 수 있다면 미국인들의 분노도 가라앉을 것이고, 아시안 혐오 범죄도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제적 문제나 불만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한인1세 단체가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행히 1.5세와 2세들이 앞장서 시위도 벌이고 동영상 홍보물도 만들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광고하고 있다. 1세 한인 단체장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고, 꼭 해야 할 일인데 그 누구도 결과가 비관적이라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공허한 부탁 뿐이다.
“진심으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우리가 애써 싸놓은 재산과 사업체가 봄날의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모두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방법은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이곳에 사는 우리가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선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다른 한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과 본인 자식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금 1.5세와 2세들이 벌이고 있는 광고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십시오. 인사치레 수준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후원을 말입니다.”
비록 칼럼을 써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비워지지 않는다. 마침 띠동갑 큰 누나가 사임당 소사이어티 회장직에 취임한다기에 축하해 주기 위해 갔다가 불씨 같은 희망을 보았다. 외유내강이라 하지 않았던가. ‘외유’를 목적으로 1.5세와 2세가 아시안 광고 활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 1세들은 ‘내강’을 위해 영어문화권에서 살아가는 2, 3세와 혼혈 한인 2, 3세들에게 한국혈통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 시켜 불안함을 자신감으로 바꿔주는 일도 필요하다.
특유의 한국 ‘아줌마 파워’, 남자들보다 통이 몇 배 큰 한인 여성들의 힘, 직접 뭘 하지 못하더라도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멍석은 깔아줄 줄 아는 배려심 있는 여성들이라면 ‘외유내강’에서 절반은 해 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보였다.
1903년부터 시작한 미주이민역사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진실이 있다. 초창기 하와이와 멕시코 유카탄, 쿠바의 애니깽 농장으로 이민 온 선배 이민자들이 하루 일당의 50%를 떼어 무려 33만 불 이라는 엄청난 기금을 대한민국 건국자금으로 투자했다는 사실. 그 돈이 씨앗이 되어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위대한 사실 말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전 세계 꼴찌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나라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 운동이 한국경제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하나 없이 영국으로부터 선박 주문을 받아 한국경제가 오늘처럼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진짜 한국 경제의 초석을 누가 놓았는지의 진실 말이다.
70년대 초까지 한국의 외환 수입의 약 60%가 국제결혼 한인 여성들이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피눈물 묻은 돈이었다는 사실은 감추려 한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 같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그런 위대한 사실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협소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국제결혼 여성들이 보낸 달러가 밑천이 되어 외국에서 기계와 원료를 사 올 수 있었고, 그런 기계와 원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국제결혼 여성 덕에 이민 온 부모 형제들이 미국 시장에 팔면서 수출판로가 개척되어 한국 경제가 세워질 수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두 감추기만 하려한다. 하지만 나는 자랑삼아 말하고 싶다. 내 큰 누나가 그렇게 위대한 시대적 사명을 실천했던 국제결혼 여성 중 한분이고, 누나 덕에 내가 미국까지 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노라고. 사임당 소사이어티에 가보니 누나같은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
우리 한인 이민 사회는 그렇게 시대정신에 맞춰 살아왔다. 독립을 위해서는 흥사단을 만들어 건국자금을 대주었고,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국제결혼 여성들이 초창기 달러를 제공해 주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한민통과 인권연을 만들어 민주화를 완성해냈다.
지금까지는 조국과 고향,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조직이 구성되고 양심과 정의를 행동했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시대적 정신이 담긴 조직이 만들어져야 하고, 남이 아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에 맞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어느 종교보다 강한 재외동포의 정체성이다.
지금 직면한 재미동포 사회의 심각한 위협과 앞으로 전개될 수 있는 더 큰 사회적 문제를 대비해 이미 양심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사임당 소사이어티가 다시한번 앞장서서 내부를 강화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의 부름에 답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