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여름으로 기억됩니다.
취재차 쿠바에 다녀왔습니다. 멕시코 한국대사관에서 공산국 출입허가서를 받고 여행비자를 받아 쿠바에 갔는데, 당시 대사관 관계자는 저희가 쿠바에 가는 첫 한국인들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런 생각 없이 출발한 1주 동안의 쿠바 취재는 나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재외동포라는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였고 1.5세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취재 도중 아주 우연히 안내원으로부터 하바나시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밀폐된 공산국에 한국인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지.
찾아가 본 곳은 흙과 검불로 지은 쓰러질 듯한 오두막집이더군요. 그곳에서 초 취한 70대의 한국인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내가 “할아버지 한국분 맞아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해 하시더니 갑자기 애국가를 이별 곡의 음에 맞춰 부르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뭔가 한국말로 답해야겠는데 한국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심정으로 애국가를 불러 저의 질문에 답하신 것이었습니다. 순간 우리 일행과 할아버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 그리도 눈물이 나오던지….
쿠바에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들어가게 된 것은 1900년대 초창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이 시작된 같은 시기입니다. 멕시코 유카탄의 애니깽 농장으로 이민 간 한국인들이 멕시코 내란이 벌어지자 일부가 이곳을 떠나 멕시코 인근의 섬나라 쿠바로 이동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니깽은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알로에처럼 생긴 열대식물로 이것을 잘라 말리면 밧줄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송곳만한 가시가 솟아 나와 막 노동 중에서도 가장 힘든 막노동에 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 하루 일당으로 몇 달러를 받았던 것입니다.
호롱불 탓인지 검게 그은 노부부의 방에서 할아버지는 작은 나무상자를 꺼내 색바랜 오래된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인회라는 간판이 쓰여 있는 작은 건물 앞에서 40~50명의 동포가 모여 함께 찍은 사진, 자신이 3살 때 이제 갓 태어난 여동생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등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값진 사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속 인물 중에 아주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습니다. 안창호 선생이 어떻게 이곳 쿠바까지 오신 것인지…. 그리고 한문투성이인 작은 증서도 눈을 끌었습니다. 그 증서는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국체였고, 조국이 독립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면 돌려주겠다는 채권 증서였습니다.
재외동포들은 이렇게 시대와 영토를 떠나 지구 어느 곳에 있든 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았습니다. 만주에서도 그랬고, 상해에서도 그랬습니다. 연변이나 시베리아로 쫓겨 간 동포들은 백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으로 살아가길 고집합니다.
쿠바에서 만난 할아버지 역시 그곳에서 태어난 이민 2세입니다. 노 부부에게 “자녀분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시냐”고 물었는데, 매우 멋쩍어 하시면서 자신들은 부부가 아니라 오빠와 누이 사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너무도 가난하여 오빠가 장가를 가지 못했고, 문화적인 정서가 조선시대로 멈춰진체 쿠바의 애니깽 농장에서 살아온 여동생은 장가를 가지 못한 오빠를 두고 시집을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평생 오빠의 뒤 바라지를 하고 살아야 했던 것이 당연하였으니까요.
그런 가난함 속에서도 애니깽 농장이나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험한 막노동을 했던 우리 이민 1세들은 하루 일당의 절반가량을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희사했습니다. 당시의 문서를 근거로 추측하건대 미국 달러로 약 33만 달러가 모금되어 임시정부와 독립단체에 전달되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때 발행해 준 국체를 모두 회수한다면 복리까지 계산할 경우 한국의 웬만한 도시 전체를 팔아도 부족한 금액일 것입니다. 조국은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며 일본강점기 불법으로 남의 땅을 빼앗은 사람들의 땅을 다시 빼앗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권리자의 책임은 열심히 했지만, 재외동포들에게 진 빚에 대한 채무자의 책임도 다했는지 의문입니다.
재외동포들은 역사에서 보여주듯 애국을 행동으로 실천해 왔고, 애국의 대가를 단 한 번도 요구하거나 바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평생 장가도 가지 못할 만큼 끔찍한 가난 속에서도 부모의 대를 이어 일평생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던 쿠바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급옷에 고급 랜트카를 몰고 찾아온 우리 일행에게 단 한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올림픽 때 TV에서 잘 사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감격해 몇 날을 우셨다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억에는 이틀 끼니밖에 되지 않는 옥수수 한 사발과 한주먹도 되지 않는 커피가 고작 인데도, 손님을 대접하겠다며 우글쭈글해진 양은 냄비에 물을 끓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저는 재외동포라는 강한 동질성과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존 F. 케네디가 했던 유명한 말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라는 말을 우리 이민 1세들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비행기가 다니지 않던 시절에도 우리 재외동포들은 이미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멕시코, 쿠바가 하나로 뭉쳐 하나의 뜻을 펴나갔습니다. 일제 식민 시절에는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고, 전쟁 때에는 조국의 재건을 위한 무역 기적을 만드는데 다시 하나가 되어 해외시장 판로개척을 일구어냈던 것입니다. 유신시절 민주화 운동의 전초 기지로서 그 역할을 다 하였고, 디지털 시대 해외의 인재들을 무한 공급하는 역할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국이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떵떵거리며 ‘해외에서 고생하는 재외동포를 “미국거지”라고 비난할 때도 IMF 사태가 벌어진 조국을 위해 우리 재외동포들은 은행융자를 얻어서라도 조국에 달러를 보낸 한국의 보증인들이고 가디언 에인절들 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 곳에 사는 우리 재외동포들은 언제라도 조국이 고통스러워하거나 우리의 도움을 다시 요청해 온다면 망설임없이 또다시 한마음으로 달려갈 것이 분명합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국가, 남미, 중동, 아프리카는 앞으로 한국과 한국인이 새롭게 도전하고 개척해 나가야 할 재외동포들의 다음 영역입니다. 재외동포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써 내려갈 것이고, 한반도라는 협소한 영토의 개념에서 벗어나 한국인이 사는 곳은 지구 상 어느 곳이건 한민족의 영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실천으로 옮겨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재외동포로서의 정체성입니다.
애니깽농장의 이민 1세대 처럼 수입의 절반을 기증해 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 그저 재외동포 정책포럼 페이지에 Like 를 누르고 가입만해 주셔도 재외동포 미래가 바뀌는 결과가 되니 꼭 눌러주시고 다른이들에게도 알려주십사 하는 부탁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진사고를 가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이니까요.
One Comment
SUZI jaff
Hello every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