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무더운 어느 오후
어쩌다 보니 20세 이상 차이 나는 어른들과 30여 년간 모임을 함께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쯤 모여 점심을 함께하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인권연) 동지들이다.
그중 김 장로님은 컨비니언 스토어를 운영하다가 은퇴를 하신 분이고, 고 회장님은 봉제업에서 번 돈으로 쇼핑센터를 사서 임대업을 하고 계신 분이다. 두 분 모두 필자를 만날 때마다 “열심히 돈 벌어야 해. 누가 뭐라 해도 돈이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는 것이고, 어딜 가나 존재를 인정받게 되니까.”라고 잔소리처럼 말씀하신다.
그런 두 분이 지난주 오찬 모임에서는 조금 다른 말씀을 해주셨다. 김 장로님은, “은퇴하기 전까지 한 200만 불만 모아놓으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구먼. 계산상으로는 가능한 일인데 돈이 모여지 질 않는 거야.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목표액은 100만 불로, 50만 불, 30만 불로 계속 줄어들더니, 결국 은퇴하고 보니 손에 남은 돈은 하나도 없는 거야. 인생이 참 허무한 거 같네.”라고 말씀하신다.
쇼핑센터를 소유하고 계신 고 회장님은, “제법 큰 쇼핑센터를 갖고 있으니 별 탈 없이 여생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임대업도 말처럼 쉽지가 않아. 주위에 더 큰 쇼핑센터가 들어서면 입주자들도 빠져나가고 빈 가게는 이익이 아닌 손해가 되거든. 완벽한 은퇴계획이란 게 없는 것 같네.”라 말씀하신다.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대가를 기대할 수가 없어 보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에 나가 열심히 일해도 쇼핑센터 임대주에게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으니 말이다. 조금 남는 돈마저도 손해 보는 기간의 손실을 메꾸고 나면 내 손에 남는 이익은 쥐꼬리다. 그렇다고 고 회장처럼 갑의 위치에 있는 임대주라고 이익을 독식하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는 고 회장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갖은 임대기업의 그늘에 가려 힘을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
100여 년 전, 노숙자였던 헨리 조지라는 사람이 바로 이런 자본주의 모순을 지적한 <진보의 몰락>이라는 책을 썼다. 산업이라는 것은 일하는 노동자와 초기 투자자본을 대는 자본가, 그리고 투자 자본으로 지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땅이 모여 이익을 만들어 내고 공정하게 나누어 갖는 것인데, 그중 땅을 소유한 사람이 부당한 비율의 이익을 가져가면서 노동자들이 가져갈 이익이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대선후보로 나선 이낙연이 토지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더 심한 양극화를 초래하기 전에 바뀌어야 한다는 정책을 제시해 다행이다.
공장을 짓거나 기계설비를 사는데 들어가야 할 투자금이 월가라는 제한된 주식투자 공간에 갇혀 자기들끼리 사고팔면서 정작 공장에서는 투자금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산업을 구성하는 기본 3요소 중 노동자는 열심히 을을 해도 대가가 줄어들게 되는데, 토지를 소유한 사람의 이득은 날로 커지고 있고, 자본은 도박장과 다를 바 없는 주식시장에 갇혀 있는 모순적인 상황을 헨리 조지가 예견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거다.
지금은 자본가와 땅 주인이 정치와 언론을 거머쥐고 있어서 평화적인 상황에서는 개혁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피를 뿌리는 혁명의 역사를 번복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지혜로운 은퇴를 계획해야 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두 선배님께 이렇게 답했다.
“최근에서 깨닳은 건데요. 저에게 은퇴는 죽는 날을 의미합니다. 제가 자란 시골의 어른들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일하시거든요. 일할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권리이면서 동시에 책임이잖아요. 은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자본가와 땅 주인들입니다. 젊은이들보다 힘이 약해진 노인네들은 이제 빠지라는 거잖아요. 나이가 드셨으니 은퇴하셔야죠라는 말은 이제 나이가 드셨으니 죽으셔야죠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제가 새로 세운 은퇴계획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작은 공장을 짖는 일입니다. 이번달에 번 돈 만큼만 다음달 벽돌을 사서 짓겠다는 거죠. 그 과정에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게 열쇠같아요.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임대료나 모지기 부담을 최대한 줄이고 제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작은 공장을 완성해 나가는게 저의 새로운 은퇴계획입니다. 작은 땅이지만 땅도 장씨 가족재단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그래야 제가 은퇴한 뒤에도 가족중 누구라도 그것을 발판삼아 무엇이라도 해 볼 수 있을테니까요. 시간은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날그날 번 돈만큼만 공장의 벽돌 하나씩 쌓는 과정을 저는 은퇴라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두 선배님은 그게 옳은 말이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인정하시 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대인이 잘사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상을 현실로 실천했기 때문이고, 본인의 인생이 은퇴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까지 후손들이 계속 이어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 말씀드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후손”이 꼭 혈연으로 연결된 후손일 필요가 없다는 거다. 피를 통해 이어가는 후손도 있지만, 생각을 이어가는 후손도 있는 것이니까.
50 중반의 나이를 넘긴 나이가 되고서야; 운영하던 잡지사 문이 닫히고서야; 30년 전 읽었던 헨리 조지의 <진보의 몰락>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알고 나서야 이제 겨우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인 늦음은 있지만 죽는 날까지 노동할 권리가 있는 만큼 이제부터는 자본주의 모순을 피해 나만의 세상을 조금씩조금씩 만들어가는 값진 노동과 즐거움으로 은퇴없는 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