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천장강대임어사인야 하면, 필선노기심지 하고, 고기근골 하며, 아기체부 하고,窮乏其身行, 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궁핍기신행 하며, 불란기소위 하다, 시고동심인성 하기 위함이니, 증익기소불능 이다.
“하늘이 한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하늘은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타고난 복대로 살게 한다는 말이 된다. 약간의 지혜만 있어도 장사수완을 습득하여 부를 누릴 수도 있고, 양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편법을 이용해서라도 판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은 정해진 시급이나 월급을 받아 살면 되는 것이니 그 또한 힘줄과 뼈까지 굶주리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선비는 사대부가 되기 위해 평생 학문을 익혔다. 맹자의 가르침처럼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기 위해 굶는 한이 있어도 구걸하지 않았고, 지행일치(知行一致)라 하여 배운 것이 행동과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에 소나기가 쏟아져도 뛰질 않았다. 오로지 학업에 정진했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조선의 선비는 인문학을 기본으로 철학에 해당하는 경학(經學)을 핵심적으로 공부했다. 경학이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해명하는 공부다. 인간의 ‘이기(理氣)’와 타고난 심성(心性)의 관계를 분석하고 이를통해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해명하고자 했던 거다. 파면 팔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철학이다. 하지만 근본 원리를 깨우치면 세상만사 모든 일을 합당하게 운영할 수 있는 좋은 머리를 갖게되니 매우 중요한 공부다.
여기에 문장력도 갖추어야 한다. 설령 어려운 사상이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글로 풀어내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 믿었던 거다. 그뿐 아니라 문장력에는 법과 역사까지 꿰뚫어 논리의 틀이 완벽의 경지에 도달해야 했다. 그러니 평생을 공부해도 과거에 붙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대부가 되는 게 그렇게 좋은 것일까?
한 사람이 일생을 바쳐 공부해도 낙방을 거듭할 만큼 어려웠던 모양이다. 3대에 거쳐 낙방해 양반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집안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사대부 반열에 오르면 엄청난 부와 권력을 거머줬다. 제도적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8촌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생활비 모두를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문의 크고 작은 사업을 책임져야 했고, 굶주린 친척의 배는 채워주어야 하는 책임이었다. 그 모든 친인척 가정에 기대어 살거나 지배를 받던 노비와 농민들의 생활까지 책임을 져야 했으니 사대부 한 사람의 책임은 일개 지역의 영주와 같은 지배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정승 반열에 오르면 책임 범위도 넓어져 12촌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니 사대부는 향락을 누리는 자리라기보다는, 요즘의 중소기업 사장들 처럼 직원들보다 더 많은 시간 일하고 은행돈 빌려 회사를 지키면서도 노사분규로 욕만 먹는 그런 위치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선비가 가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오를 수 있는 게 사대부 자리라면 맹자가 말하는 하늘의 큰 사명을 받은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란 어느 정도일까?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사임당의 아들 율곡은 그렇게 어렵다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뒤집은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다. 그냥 이해하기조차 어렵다는 노자의 이기론 자체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새로운 이기론을 정립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던 퇴계 이황을 능가해 버린 어마무시한 천재였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보다 무려 174년이나 앞서 정립된 철학이고 깊이 역시 더 깊다. 하늘이 큰 사명을 내린 사람이 분명하다.
율곡에게 내린 고통과 시험은 무엇이었을까?
사임당은 어느날 먼 길을 떠난 남편과 아들 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심장질환으로 자리에 누워 생을 마감했다. 자기 죽음을 미리 알았던 거다. 성인다운 위대한 어머니를 잃은 고통은 윤리적으로 부족한 아버지와 비교되어 아들의 번뇌를 몇 곱절 더 크게 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켰으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겠는가. 가난했던 율곡은 그렇게 하늘이 내린 사명을 받아 뼈를 깍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그런 고난의 시간은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웠으리라.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선비다.
온종일 찜통같은 공장에서 박스를 조립하면서도 율곡과 신사임당을 생각하다 보니 힘든 생각이 사라진다. 짧은 시간만에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룬 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기적이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한국 선비들이 오늘을 위해 수천년간 쉼없이 학업에 정진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리 오해할 수도 있을거다. 교육은 땅에 묻혀있는 석유보다 더 기름지고 호사스러운 저택보다 더 크다.
교육은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영광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민족 선비들이 학문을 게일리 하지 않고, 위대한 어머니들이 사임당의 지행일치(知行一致)한 삶을 흉내내어 대쪽처럼 바르게 서 있는 한, 한국의 모든 선비와 사임당은 8촌 이내의 생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의 생계까지 책임질 수 있는 진정한 사대부로 올라설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