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은 왜 서양인들이 마스크를 거부하는지 의문을 제기할 때가 많다. “마스크를 쓰면 본인도 좋고 다른 사람들도 좋은데”라는 의문. 이유야 수백 가지가 넘겠지만, 그중 하나가 서양인들의 정면 승부사적인 사고방식 때문일 거다.
나폴레옹의 전쟁이나 미국의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의 전쟁 영화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온다. 양측이 날짜를 정해 벌판에서 만나고,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서로에게 총을 쏘아 대는 거다. 초반에는 숨지도 않고 서서 쏘는데 다들 바보처럼 보인다. 서양문화에는 결투라는 것도 있는데 적정거리를 두고 서로 총을 한발씩 쏘아 맞은 사람이 죽는 것이고 살아난 사람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좋게 해석하면 비겁함이 죽기보다 싫어서 벌이는 행위다. 우리는 비가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정장차림일때만 우선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면 승부사적인 사고방식은 부작용도 크다. 베트남 전쟁처럼 적이 정글에 숨어서 싸우거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적군이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할 때는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패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중국도 오랜 세월 정면 승부사적인 삶을 살았다. 손자병법이니 오자병법이니 하는 유명한 고대 병법서의 주요 내용이 진용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고 정면 승부사적인 전술로 가득하다. 그런 중국의 병법은 성에서 나오지 않고 숨어서 싸우는 적군에게는 힘을 쓰지 못하고 패하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이 이끈 소수의 군대가 몇백만의 군을 몰고 온 당태종 이세민을 처절하게 무찌른 기적같은 이야기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이세민이 맞았다면, 당태종 이세민이 군대의 후방에 서 있었는지 전방에 서 있었는지를.
다시 말해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사상은 정면 승부사적인 사고방식이었고, 제국의 침공을 막아야 하는 주변국의 생존 사상은 철저한 방어에 포인트가 맞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거다.
둘 중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 정면 승부사적인 것이 정정당당해 보일 수 있지만, 자멸을 초래할 수 있으니 바보스러울 수 있고, 숨어서 꾀를 부려야 하는 방어적인 사상은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도 있으니 비겁해 보일 수 있지만 지혜로운 행동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서로 사고방식을 존중해 주어야 하고 서로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코로나로부터 영원히 숨을 수 없다면 소수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걸려서 면역력을 키워 극복해야 한다는 정면 승부사적인 사고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거다. 같은 맥락에서, 마스크를 쓰고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방어적인 사람들 역시 비겁하다고 욕할게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서로 “당신들은 왜 그러느냐”고 묻거나 조롱하지도 말고, “당신들은 당신들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이 위기를 잘 극복합시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문화 충격은 파괴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평상시에는 문화 충격의 파장이 크지 않지만, 위기의 상황에서는 무서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서로의 사고방식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언론과 정치의 역할이다. 국뽕에 도취해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서양인들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언론의 반대적인 행위다. 다행히 한국 정부도 언론개혁법을 정비하려 하는 것 같다. 개혁의 방향이 바로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함이길 기대해 본다.
문화적응 교육을 존립의 목적으로 삼은 사임당 소사이어티의 역할은 이런 입장을 한국과 미국의 언론에 계속적으로 제시하는 일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