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 일부는 큰 뜻이 있어 이민을 왔을 거다. 미래가 없는 현실에서, 기회의 땅을 찾아온 이도 있다. 내 경우다. 부모·형제의 끼니를 채워주기 위해 무서움을 떨치고 온 사람도 있고, 외국인과 혼인하여 이민 온 이도 있다. 명석한 두뇌를 아까워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유학을 온 이들도 있지만, 사건·사고를 저지르고 도주해 온 사람도 있다.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재외 동포라는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우연히 이곳에 떨어져서 그냥 살아야 하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명분을 얻고 싶은 욕심 때문일 거다. 실제의 삶이 너무도 초라하고 무의미 하다 보니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이 컸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부족하다 보니 선배 이민자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분들의 정체성을 빌려서라도 “나는 누구이고 왜 이곳에 살고 있는가?”의 답을 폼나게 치장하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고독함을 느끼는 이방인의 공허함 때문이리라.
공부의 대상은 미국 시민권 취득 1호, 의사면허 1호를 받은 서재필 선생과 한민족 최고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이들의 삶과 말을 통해 재미교포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거다. 1997년, 30대 초반이던 나는 재외동포재단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책을 기획할 숙제를 받았다. 그 숙제를 받아든 나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총재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이 시작은 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귀국했던 재외 동포 사업을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역사의 세심한 사실까지도 꿰뚫어 보고 계시던 총재님은 더 이상의 설명을 듣지 않고도 내가 무엇을 말씀드리려는지를 대충은 알아채신 것 같았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 한 페이지로 정리해서 주게.”
제목을 <이중국적 허용과 동포청 설립 제안서>라 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가는 헌법정신에 기반하여 해외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이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한인 이민자들이 주로 종사하는 세탁소, 봉제공장, 뷰티서플라이, 네일샵 등 산업별로 나누어 이를 대표하는 한인 단체를 지원하여 산업 특성에 맞는 연구와 개발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탁협회는 세탁에 사용되는 약품을 한국의 화학회사와 공동으로 연구 개발하여 운영경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협회가 특허권이나 우선권을 갖게 하면 한인 업자들은 다른 누구보다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거였다. 뷰티서플라이는 지역협회별로 각각의 제품 브랜드를 개발하여 한국에서 생산하도록 하고 그것을 수입해 브랜드 수익을 창출해 내자는 취지였다. 한국의 중소기업에도 이득이 되고, 각 지역의 협회도 수익이 발생하여 넉넉한 자본으로 더 큰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계획. 그리고 그런 모든 상공인협회를 관리 감독하는 한인회라면 분명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되므로 이전보다 훨씬 더 확실한 리더십을 갖게 될 것이라 본 것이다.
기획서는 미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 공청회를 통해 소개되었고, 김대중 후보의 정식 공약으로 채택되었다. 크레딧 카드를 쓰면서 출장을 다녔는데 그로 인해 카드빚은 35,000불이나 늘었고 몇 년에 걸쳐 갚았던 추억도 있다. 신임 대통령은 취임하고 100일 동안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을 실행하는 관례가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대통령님은 재외 동포 정책을 그 안에 넣어 주셨다. 재외 동포와의 약속을 지켜 주신 거다. “당신이 그린 그림이니, 당신이 맡아서 하는 게 옳다”는 당부도 들었는데 나이가 어리고 경륜이 부족해 정중히 거절했다. 한인 사회에는 이미 많은 지도자가 있으니 내가 아니더라도 잘해주시리라 믿었던 거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한인 단체의 여러 인사가 서로 주도권을 쥐겠다고 야단법석을 부리면서 법무부가 제동을 걸어 온 거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서면서 사기행위가 우려되어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어리숙하고 아쉬운 일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큰 것을 얻을 수 있던 단체가 서로 더 먹겠다고 덤벼드는 바람에 모두 굶게 된 어리석은 결과.
나는 지금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서재필 선생이 시작은 했는데 끝내지 못하신 사업이 꼭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나는 그 숙제를 완수하지 못했지만, 후배 이민자들이 언젠가는 꼭 완성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도산이 어떤 일을 끝내지 못했는지의 짧은 사연을 11월 도산 안창호 기념일에 즈음하여 사임당소사이어티 방에 남겨 두고자 한다. 나보다 글솜씨가 더 좋은 사람이 도산의 약사를 정리해 놓은 것이 있어 그분의 글을 이곳에 옮겨두기로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안창호 [安昌浩] –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 위해 헌신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세상 구경에 나선 선생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된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선생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서당 선배인 필대은과 함께 고향 강서로 가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질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선생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냉철히 구하였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 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고향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선생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선생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공립협회 창립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선생을 사로잡은 일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었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선생은 한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천시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1904년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취업해 있으면서 부인을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된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청소해주었다. 각 집에 커튼을 치게 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아 꽃씨를 심어 주는 등 주변 환경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며 경계하던 한인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인들은 매사 모든 일을 선생과 의론하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선생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이 때 고국에서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중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선생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국내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선생을 당혹케 하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늑결하고 광무황제가 인준하지 않은 조약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어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노골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크게 낙담하던 차, 동지들은 선생의 귀국을 종용하며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 하며 거절했지만 동지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노동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공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겠다며 강권하며,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뿐임을 설득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우치다(內田良平)가 선생이 4월경 서울, 대구, 원산 등지로 유세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한국통감부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