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당시 노동 임금은 주당 $2.50, 일당 50센트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재미동포가 모은 성금은 약 30만 불이다. 국체를 발행해 주었기에 증빙자료가 있는 사실이다.
당시 미주동포는 약 1,000명. 멕시코 유카탄과 쿠바에 몇백 명씩 거주하고 있었다. 하루 일당의 절반인 25센트를 1년 내내 쉬지 않고 모으면 $91.25. 재미동포는 한 푼이라도 더 내고 싶은 욕심에 하루를 이틀 삼아 두 곱으로 일했다.
서재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벽보 붙이는 허드렛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고, 어느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필라델피아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는 노예제도가 끝난 직후였는데, 동양인이었던 서재필 선생은 졸업식에서 학생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다. 명문 사립고등학교 백인학생 모두를 제치고 말이다.
이후 워싱턴 디시에서 동의보감 같은 한의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흑인은 물론이고 유대인조차 입학이 허락되지 않던 시절에 그랬다는 거다. 의과대학에서도 서재필은 2등으로 졸업했다. 그것도 3년 의예과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말이다.
갑신정변으로 본처가 감옥에서 자결하고 자식까지 죽어 홀아비로 지내던 서재필은 미국의 15대 대통령을 배출한 당시 명문가의 미녀를 만나 1894년, 30세에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한인으로는 1호 시민권자였던 서재필 선생이 남긴 교훈은, ‘이곳이 미국이라서 못하고, 영어 때문에 못 하고, 돈이 없어서 못 하고’ 등은 핑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하면 되는 것이고, 뭐든 열심히 하면 서양인들 사이의 동양인이라도 존경받고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어제 이낙연 전 총리 모시고 조지워싱턴대학 근처에 갔다가 그 길을 걸어 다녔을 서재필 선생에 대해 나눈 이야기다.